패션 매거진 마리끌레르는 매년 봄 영화제를 연다. 패션 매거진의 영화제라니. 벌써 6년째 영화제를 열고 있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패션 매거진이 주도하는 영화제의 정체성을 두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패션과 뷰티 트렌드뿐 아니라 여성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영화와 음악, 책과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깊이 관심을 기울여온 마리끌레르라면 작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들을 소개하는 영화제를 기획한다는 사실이 부자연스러울 것도 없다.
다양한 여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온 마리끌레르가 주최하는 영화제답게 올해 개막작으로 선정한 영화 <히든 피겨스>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영화는 1960년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배경이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3명의 여성 흑인 수학 천재들이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발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활약상을 그린다. 흑인 여성을 보는 미국 사회 전반의 견고한선입견과 편견은 단지 그 시대 그들만의 장애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분명히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 이런 것들을 떠올리며 우리는 이 세 주인공을 응원하게 될 것이다.
4일간 이어지는 마리끌레르 영화 제의 문을 닫는 폐막작은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사랑과 시간과 죽음을 만났다>다. 내용은 이렇다. 딸을 잃고 슬픔에 빠진 한 남자와 그 아픔을 이용해 그를 회사에서 쫓아내려는 동료들, 이를 위해 동원된 ‘사랑, 시간, 죽음’이란 역할을 맡은 세 인물. 하지만 영화는 사회의 냉정함 대신 인생은 사람들이 있어 살 만하다는 걸 보여준다.
올해 마리끌레르 영화제는 배우 특별전을 준비했다. 그 주인공은 배우 정우성이다. 지난해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을 보여준 <아수라>와 밀도 있는 멜로 연기가 담긴 <마담 뺑덕> 그리고 아마도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영화일 <비트>, 총 3편을 준비했다. 20대 청춘을 지나 지금까지, 어 느 시기에나 뜨거운 배우였던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도 관객을 기다린다. 실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 러시아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의 이야기를 그린 <댄서>와 사진가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메이플소프>는 극영화와는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캐나다의 3대 감독으로 꼽히는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 장 마크 발레의 <데몰리션>, 자비에 돌란의 <마미>도 볼 수 있다. 그 밖에 권태로운 삶에 지친 한 중년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아노말리사>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폭력에 짓밟힌 여성들을 돌보는 여의사의 이야기를 그린 <아뉴스 데이>등 총 34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이 34편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을 꼽으라면 답하기 어렵다. 다만 극장에서 상영할 기회가 많지 않고 이미 개봉했지만 아쉽게 보지 못한 영화들, 혹은 유명하진 않지만 썩 괜찮은 영화라는 것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겠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을 볼 수 있는 작은 축제의 자리, 누구라도 안식과 위안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마리끌레르 영화제가 지향하는 그림이다. 제6회 마리끌레르 영화제는 3월 2일부터 3월 5일까지 CGV청담씨네시티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