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규, ‘창고 피스’, 2004
포장하여 쌓은 작품 더미, 목재, 팔레트, 가변크기
하우브록컬렉션, 베를린
<복수도착> 전시 전경, 브레겐츠 미술관, 브레겐츠, 오스트리아, 2011
2022년 8월 초, 작가 양혜규(HY: Haegue Yang)와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큐레이터 융 마(YM: Yung Ma)의 대화.
YM 언제 우리가 처음 만났는지 기억해요? HY 2008년 홍콩에서였을 거예요. 그때 저는 당시 파라사이트의 관장, 토비아스 베르거(Tobias Berger)와 큐레이터, 크리스티나 리(Christina Li)가 주최한 워크숍에 초대 받아서 홍콩에 갔어요. 두 사람 다 당신과 가까운 사이죠. 사실 그 워크숍은 참여 작가 모두 광저우 트리엔날레에 함께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비자에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겨서 저 혼자 홍콩에 남게 됐고, 크리스티나가 융에게 저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죠. 맞나요? YM 정확해요. 광저우로 떠나기 전 우리는 작가들의 아지트였던 클럽71이라는 술집에 다 같이 갔어요. 엘진 스트리트에 있는 바에서 한잔하면서 나누던 대화도 기억 나네요. 작가님이 홍콩에 발이 묶여 있을 때였죠. 우리 둘이서 제대로 같이 시간을 보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이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것 같은데…. 이 작가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인터넷에서 이름을 처음 검색해 봤죠. 그때 작품도 처음 봤고요.
HY 우리 또 어디서 만났죠? YM 수많은 장소와 행사에서요. 홍콩 이후로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재회했고요. 당시 작가님은 한국관 작가로 참여했고, 저는 홍콩관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베니스에서 작가님이 머물던 숙소에서 함께 근사한 저녁을 먹었죠. 한국관 어시스턴트들과 아르세날레 전시관 바닥에 앉아 작품을 해체하면서 광원 조각의 전구를 포장하는 작업을 ‘거들었던’ 기억도 나요. HY 그건 기억이 안 나네요. 다만 그때 한국관 커미셔너였던 주은지 큐레이터와 함께 매일 우리 설치팀을 위해 점심을 준비하던 기억은 납니다. 가끔 다른 전시관 작가와 큐레이터를 초대해서 저희 숙소에서 같이 저녁을 먹기도 했어요. YM 그동안 작가님의 전시 오프닝에도 꽤 많이 참석했어요. 2011년 브리스톨 아놀피니 전시, 2018년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 회고전 <도착 예정 시간(ETA) 1994-2018>, 2019년 사우스 런던 갤러리에서의 <움직임을 추적하며(Tracing Movement)> 등. 팬데믹 이전에 열린 여러 미술 관련 행사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도 많았죠. HY 맞아요. 사우스 런던 갤러리에서 열린 제 개인전에서 대담 행사를 같이 하기도 했어요. YM 우리의 첫 공식 행사였죠. 작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오프닝에서 작가님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반가웠어요. 해외 미술인들이 입국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을 만나서 전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HY 최근 코펜하겐 SMK에서 열린 <이중 영혼(Double Soul)>(2022) 전시를 방문한 걸로 알아요. 어떤 점이 흥미로웠어요? YM 작가님과 큐레이터가 미술관 공간을 ‘활용한’ 방식이 흥미로웠어요. 특히 ‘이중(double)’이라는 개념을 공간적인 측면에서 펼쳐 보인 점, 다양한 작업 요소와 여러 시기의 작품들을 중첩한 점이 재미있더라고요. 텍스트 작업 ‘욕실 묵상(Bathroom Contemplation)’(2000)을 다시 보니 정말 반가웠어요. 곳곳에 배치해둔 아이패드에 등장해서 전시를 해설하는 소위 ‘아바타(avatar)’는 어떻게 고안하게 된 거예요? HY 교훈적(didactic)인 전시 소개 영상을 제작하는 게 요즘 미술관의 새로운 전시 표준이 됐는데요. 작가 스스로 ‘똑똑한 해설자’로 등장하는 일이 여전히 좀 힘드네요. 복제된 목소리와 얼굴을 활용해서,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작가가 등장하는 기존의 소개 방식에서 도망가고 싶었어요. 복제된 음성이 덴마크어를 구사하게 한 이유는 현지인에게 ‘다가가고’ 싶은 바람의 표현입니다. 또한 덴마크인 아버지와 이누이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피아 아르케(Pia Arke)에게 덴마크어는 고통의 언어이기도 했어요. 피아에게 덴마크어는 적의 언어인 동시에 자신의 모국어였으며, 자신의 이누이트 유산을 연구하는 언어적 도구였던 거죠. 문화적 유산과 이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융 마가 살아온 여정이 궁금해요. 우리가 서로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이미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였죠. 융도 여러 도시를 옮기며 살았잖아요. 저를 알게 된 당시에는 뭘 하고 있었고, 그 이후엔 어땠나요? YM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홍콩에서 일하고 있었고, 이후에 런던으로 갔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M+ 미술관에 합류했어요. M+에서 5년간 일한 뒤 파리의 퐁피두 센터로 옮겼고요. 2019년에는 운 좋게도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예술 감독으로 선정됐습니다. 원래 2020년 개최 예정이었는데, 팬데믹으로 1년이 연기됐어요. 유럽에 봉쇄령이 내리기 직전인 2020년 2월에 파리와 퐁피두 센터를 떠나 런던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원격으로 비엔날레 준비를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의 큐레이션 팀에 합류했고요.
HY M+에서 일할 때 제 영상 작품을 전시하지 않았나요? YM 네, 영상 작품 ‘비디오 삼부작’(2004~2006)을 영화관에서 상영했죠. 제가 2015년에 기획한 전시이자 영상 상영 프로그램인 <모바일 M+: 무빙 이미지(Mobile M+: Moving Image)>전의 일부였어요. 이 전시에서 늘어만 가는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이주 관련 언론 보도라는 현상에 대해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한편 심리학적으로 반응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대개 심한 분열을 자아내고 결국 정치적 문제로 귀결되고 마는 이 주제를 인간적으로 다루고 싶었어요. 애초부터 ‘비디오 삼부작’이 상영 목록에 있었는데 작가님이 과연 영화관 상영에 동의할까 걱정했어요. M+ 사무실 밖에 서서 우리 둘이 이에 관해 나눴던 대화가 기억납니다. 둘이 일을 같이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솔직히 대화를 많이 나누진 못했어요.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하고, 마침내 같이 일하고 있으니 꿈만 같고 기쁩니다. HY 우리 전시는 2024년 예정이고,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선보인 <도착 예정 시간(ETA) 1994-2018>(2018) 이후에 갖는 또 한 번의 회고전이 되겠네요. <도착 예정 시간>에서는 어떤 부분이 기억나요? YM 규모가 어마어마했죠. 서둘러 보고 나왔기 때문인지 제대로 볼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작품 세계를 총정리하는 전시이자 양혜규라는 작가의 활발한 활동을 증거하는 전시였죠. ‘창고 피스(Storage Piece)’(2004) 같은 초기작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도 감사했죠. 그때까지 온라인으로만 읽고 알던 작품이었거든요. 오랜 시간 작업해온 광원 조각과 움직이는 조각의 ‘진화’가 눈앞에서 펼쳐지니 뭉클하기도 했습니다. 헤이워드에서 열릴 전시는 그 정도의 규모와 방식으로 작업을 총망라하지는 못할 겁니다. 일단 그럴 만한 공간이 없어요. 물론 즐거운 도전이긴 하겠지만, 그래서 작품 선정이 만만찮을 거예요.
HY 솔직히 말하자면 융 마가 진행한 프로젝트를 많이 보지는 못했어요. 2021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를 제외하면요. 한국 사회와 미술계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됐겠네요. 혹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예술 감독으로 일한 경험이 저와 제 작품을 보는 관점에 영향을 줬나요? YM 어느 정도는 이해가 깊어졌지만, 한국어를 모르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겠죠. 흥미롭게도 이제까지 양혜규 작가의 작품을 ‘한국인’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양혜규라는 미술가, 한 명의 개인, 작품으로서만 바라봅니다. 그 세 가지를 자주 겹쳐지는 두 개의 원을 통해 봐왔습니다. 한쪽 끝에는 개인적이고 친밀하며 어느 정도 일대기적인 서사가 있고, 다른 쪽 끝에는 다양한 문화, 전통, 모티프, 신념을 자유롭게 연결함으로써 기존의 경계를 뛰어넘는 능력과 야심이 있죠. 잘못 짚었나요? HY 전혀요. 제 정체성을 국가라는 문맥 밖에서 봐줘서 기쁩니다. 저는 정말로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서고 싶거든요.
YM 작업(practice)이 크게 진화했는데요. 변화의 계기가 있나요? HY 전환점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저는 보통 두 개의 프로젝트를 꼽습니다. ‘창고 피스’와 <사동 30번지(Sadong 30)>(2006)입니다. ‘창고 피스’는 런던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을 때 제작한 작품이에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집도 없이 생활하면서 작품을 보관할 장소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제작비는 모조리 작품 운송비에 쓰고, 갤러리는 보관 장소로 사용하기로 했어요. 그러니 제작비가 제로인 셈이죠. 스무 점이 넘는 완성작 내지 미완성 작품으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는데도 말이죠. ‘창고 피스’는 난감한 개인적인 상황과 공개적인 작가의 행위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을 전제로 탄생했어요. <사동 30번지>는 제게 많은 영향을 준 프로젝트입니다. 인천의 한 폐가에서 전시를 열었어요. 직접 주도한 이 전시의 가장 핵심은 제도의 틀 밖에서 열렸다는 점이죠. 누가 날 불러준 게 아니니, 제도적인 의무가 없었습니다. 전시장에 작품을 전시한다는 통념에 갇힐 이유가 없었어요. 그저 관람객은 사동을 방문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했죠. 그렇게 지도를 보고 힘들게 찾아와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 자물쇠를 직접 열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 프로젝트에는 공간을 찾아오는 관람객의 기대와 경험, 매번의 참여, 그리고 감정과 정서까지 포함됩니다. 심지어 사동 30번지 앞으로 온 몇 통의 편지를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도록에 수록하기도 했어요. 전시 후 3년이 지나니 이 편지들을 공개해야겠다 싶었죠. 이 전시가 방문자의 자기 주도성(self-empowerment)에 얼마나 의거하고 있는지를 그 편지들이 잘 보여줬거든요. 또한 <사동 30번지>를 통해 선풍기, 거울, 스트로보 조명 등의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장치와 기존의 조각이나 장르 기반의 발상을 넘어서는 요소들을 이용하는 실험을 처음 해봤어요. 심지어 생수병을 가득 채운 아이스박스와 식물도 등장합니다. 제작 과정에는 이 폐가를 재등기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래야 전기 같은 공공 설비를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양혜규, ‘펼쳐지는 장소(비디오 삼부작 I)’, 2004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8분 15초,
런던과 서울에서 촬영,
목소리: 헬렌 조(영어), 크리스티나 스톡호페(독일어)
영상 스틸
양혜규, ‘주저하는 용기(비디오 삼부작 II)’, 2004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9분 7초,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서울, 베를린에서 촬영,
목소리: 카미유 헤스케스(영어), 니나 비스나그로츠키(독일어)
영상 스틸
양혜규, ‘남용된 네거티브 공간(비디오 삼부작 III)’, 2006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7분 57초,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파울루에서 촬영,
목소리: 데이비드 마이클 디그레고리오(영어),
라파엘 플레히트너(독일어)
영상 스틸
YM <사동 30번지>를 봤어야 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 전시로 한국 미술계에 (다시)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업 작가’로서의 첫발을 유럽에서 뗐잖아요. (동)아시아 작가로서는 흔치 않은 경우죠. 스스로 본인을 세계화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해요? HY 직업적인 면에서는 그렇죠. 1994년경 프랑크푸르트의 국립 미술학교 슈테델슐레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아시아 출신 작가가 유럽에 정착해 전업 작가로 일하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어요. 당시 미술계는 지역으로 나뉘어 있는 것 같았어요. 국제성은 뉴욕, 파리, 런던 같은 서구의 몇몇 주요 도시의 미술계에서나 볼 수 있었죠.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제적인 미술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이었어요. 비록 비엔날레가 서서히 지역주의를 지양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동시에 주류 서구 예술계에 맞서는 대항마 역할을 하긴 했지만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족쇄를 고려할 때 일종의 본보기로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아시아계 작가로는 당시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가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눈에 띄는 활동으로 꼽을 수 있는 아시아 출신 큐레이터로는 후 한루(Hou Hanru)가 유일했죠. 당시만 해도 아시아 작가의 영향력과 존재감은 전무하다시피 했어요. 그때 저는 오리엔탈리즘과 식민주의에 관해 깊이 고심했어요. 비록 그 두 단어를 지적으로 완전히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깊이 느꼈죠. 세계화, 그리고 세계화가 가져온 국제적 합의와 국제성의 결실이 저한테는 고통 그 자체였어요. 낯선 문화와 언어를 혼자서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제 노력은 그야말로 ‘일방통행’이었어요. 저 말고는 누구도 아시아의 역사와 사회, 미술계를 이해하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거든요.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면서 유일하게 좋았던 건 이 모든 일이 온전히 저한테 달려 있다는 점이었어요. 저는 분명 세계화의 파도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고, 어쩌다 한 번씩 파도 위에 완벽하게 균형을 잡고 서기도 했습니다. 세계화라는 거친 파도가 저를 작가로 단련시켜줬고, 또 덕분에 세계 곳곳을 다니며 다양한 인물과 현상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죠.
YM 그래서 양혜규를 국제적인 작가라고 불러도 되는 거겠죠? 그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HY 동의하지만, ‘독립적인 작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독립적이라는 말이 다양한 함의를 가진 주관적인 용어이긴 하지만요.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저는 국제적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그 공동체는 사실 여느 지역 미술계처럼 배타적이고 폐쇄적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독립적인 작가들의 느슨한 합의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양혜규, ‘사동 30번지’, 2006
전구, 스트로브 조명, 전구 체인, 거울, 종이접기 오브제, 빨래 건조대, 천, 선풍기, 전망대, 아이스박스,
생수병, 국화, 봉숭아, 목재 벤치, 벽시계, 야광 페인트, 합판 조각, 스프레이 페인트, 링겔대
가변 크기
*인천의 한 폐가에 장소특정적 설치
작가 제공, <사동 30번지> 전시 전경, 인천, 한국,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