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8일버질 아블로(Virgil Abloh)가 세상을 뜬 지 어느덧 2년이 되는 날입니다. 패션을 비전공한 건축학도가 파이렉스 비전(Pyrex Vision)과 빈 트릴(Been Trill), 오프 화이트(Off-White) 브랜드를 거쳐 루이 비통(Louis Vuitton)의 남성복 디렉터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죠. 끊임없는 도전과 뛰어난 창의력으로 점철된 그의 세월이 일궈낸 성과이자 역사입니다. 버질 아블로가 걸어온 발자취 중 잊지 못할 다섯 순간을 떠올리며 그의 2주기를 추모합니다. Virgil was here.

루이 비통의 2019 봄-여름 컬렉션

버질 아블로는 흑인으로서 최초로 루이 비통(Louis Vuitton)의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는 패션 산업 내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깨뜨리며 인종의 한계를 부순 것을 의미했습니다. 버질 아블로가 루이 비통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던 2019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에는 다양성에 대한 메시지가 녹아있었죠. 파리의 팔레 루아얄 정원 한복판에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 컬러의 런웨이가 수놓았고, 여러 인종과 직업을 가진 모델들이 런웨이 위로 등장했습니다. 버질 아블로는 키드 커디(Kid Cudi), 플레이보이 카티(Playboi Carti), 스티브 레이시(Steve Lacy)같은 힙합과 알앤비 뮤지션부터 블론디 맥코이(Blondey McCoy), 루시엔 클라크(Lucien Clarke)처럼 프로 스케이터까지 여러 아티스트를 캐스팅하며 정형화된 모델 캐스팅에서 탈피한 방식을 선보였습니다. 비즈니스 관계자 이외에도 파리의 패션 스쿨 학생들을 컬렉션에 초대하여 미래의 패션을 이끌어갈 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선물했죠. 쇼가 끝난 후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You can do it too…”라며 전 세계의 꿈꾸는 이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한 마디를 전했습니다.

 

칸예 웨스트

버질 아블로의 매 순간 그의 곁에는 늘 칸예 웨스트(Kanye West)가 함께 있었습니다. 시카고 출신의 두 사람은 시카고의 한 인쇄소에서 처음 만나 그 인연을 쭉 이어왔죠. 버질 아블로는 2009년 칸예 웨스트와 함께 이탈리아의 럭셔리 브랜드인 펜디(Fendi)에서 인턴십을 하며 패션계에 발을 들였고, 2010년에는 칸예 웨스트의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인 돈다(DOND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전체적인 비주얼 디렉팅을 맡았습니다. 칸예 웨스트와 제이지(Jay-Z)의 합작 앨범 <Watch the Throne>의 아트 디렉팅과 <Yeezus>의 앨범 커버 디렉팅을 직접 한 것은 유명한 일화죠. 처음으로 만든 프로젝트 브랜드인 파이렉스 비전의 체크 셔츠를 칸예 웨스트가 입으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버질 아블로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2010년대 초반의 두 인물은 패션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합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칸예 웨스트는 이지(Yeezy)를 만들고 버질 아블로는 오프 화이트를 만들어 스트리트 패션의 한 획을 그었죠. 버질 아블로가 루이 비통 첫 컬렉션이 끝난 후 칸예 웨스트를 부둥켜안으며 흘린 눈물에는 그들의 지난 역사와 우정이 담겨있었습니다.

 

나이키 ‘더 텐’ 프로젝트

버질 아블로는 이케아(IKEA), 리모와(Rimowa), 스투시(Stussy), 에비앙(Evian), 바이레도(Byredo) 등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비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협업은 나이키(Nike)와 진행한 프로젝트 ‘더 텐(THE TEN)’입니다. 하나의 모델이 아닌 10가지의 모델을 활용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공개했죠. 버질 아블로는 에어 조던 1, 에어 맥스 90, 에어 프레스토처럼 손으로 뜯고 다시 재구조화시키거나 컨버스 척 테일러나 에어 포스 1처럼 반투명한 어퍼를 활용해 드러내는 등 ‘REVEALING’과 ‘GHOSTING’ 두 가지 테마로 나눠 서로 다른 디자인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이후 프로젝트의 시그니처인 타이포그래피 서명이나 케이블 타이는 버질 아블로의 손길을 의미하는 요소가 되었죠. 더 텐 프로젝트는 스니커즈를 고급 아이템 카테고리로 만들고, 일반 소비자들까지 스니커즈씬에 관심을 가지게 한 점에 있어서 높은 가치를 가지는 협업이었습니다.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 강연

버질 아블로는 꿈을 가진 이들에게 아낌없는 조언과 도움을 주며 문화·예술 분야의 산업의 성장에 이바지했습니다. 2017년에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Insert Complex Title Here’이라는 주제로 하버드 학생들에게 디자인 강연을 했습니다. 본인이 디자이너로서 걸어온 길과 디자인 접근 방식 그리고 나이키와 이케아와의 협업에 관한 이야기를 했죠. 레디메이드, 인용, 3%의 접근, 두 가지의 영역에서의 타협, 작업 진행 중 표기, 사회적인 코멘터리, 여행자와 순수주의자에게 동시에 다가가기로 7가지의 디자인 언어를 정리하며 학생들에게 디자인적 시선과 태도 그리고 접근을 알려줬습니다. 이는 디자이너를 비롯한 건축가, 예술가 등 창의적인 일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을 준 강의였죠. 또한 해당 강연이 끝난 후 신발을 던지면 직접 사인을 해주겠다는 버질 아블로의 말에 하버드 학생들의 신발들이 마구 날아다니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virgilabloh(인스타그램)

애플 뮤직과의 텔레바이즈드 라디오

버질 아블로는 뛰어난 디자이너이기도 하지만 음악에도 열렬한 애정을 표하는 DJ이기도 합니다. 음악은 그의 유일한 안정제라고 전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죠. 칸예 웨스트의 앨범부터 굿 뮤직(G.O.O.D. Music), 에이셉 라키(ASAP Rocky), 빅 션(Big Sean) 등의 앨범까지 걸출한 아티스트와도 작업을 진행하며 음악 분야의 교류를 확대했습니다. 본인의 오프 화이트 컬렉션 쇼의 사운드트랙을 직접 작업하여 사운드 클라우드에 ‘Paris, IL’이라는 이름으로 믹스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코첼라(Coachella)’, ‘캠프 플로그 그노우 카니발(Camp Flog Gnaw)’ 그리고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의 ‘애스트로월드 페스티벌(Astroworld Festival)’에서 디제잉을 선보이는 등 디제이로서의 커리어를 쌓았죠. 2018년에 애플 뮤직(Apple Music)은 버질 아블로를 호스트로 하여 직접 선곡한 믹스인 ‘텔레바이즈드 라디오(TELEVISED RADIO)’를 공개했습니다. 총 5편으로 이루어진 해당 믹스들은 버질 아블로의 음악적 취향과 센스를 엿볼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입니다. 힙합과 테크노 그리고 아프리칸의 레게 사운드 등이 가미된 믹스에서는 그의 폭넓은 음악적 식견을 느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