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는 발렌티노 쿠튀르 컬렉션을 위한 모델 캐스팅 이틀 전 한 가지 상상을 실행으로 옮겼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건 다양한 아름다움이었다. 만약 세실 비튼의 ‘찰스 제임스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라는 사진 속 모델이 흑인이었다면?’ 그 발상의 전환 덕분에 이번 시즌 발렌티노 쿠튀르 드레스는 대부분 리야 케베데나 나오미 캠벨 등 초콜릿색 피부를 가진 여성들 차지가 되었다. 형형색색의 드레스는 모델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극적인 순간을 연출했고, 14년 만에 발렌티노 쇼에 선 나오미 캠벨은 피날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순간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피치올리의 선택은 패션업계가 점점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한때 슈퍼모델이었지만 한동안 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48세의 흑인 모델을, 그것도 럭셔리의 정점을 보여주는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메인 모델로 내세운 행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패션계의 미적 관념은 최근까지도 그다지 카테고리가 넓지 않았다. 모델 선택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한마디로 말하면 ‘어리고 키가 크며 마른 백인’ 모델을 선호한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모델 하면 여전히 얼굴 생김새를 떠나 마른 몸매와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 사이의 나이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고정관념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 젊은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보면 다양성을 존중한 모델 캐스팅을 당연시하는 태도가 느껴진다.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를 예로 들어보자. 베트멍을 이끌던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쇼에 세운 그는 럭셔리 하우스 브랜드 발렌시아가를 진두지휘하게 된 후에도 변함없이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 발렌시아가 2019 S/S 컬렉션을 훑어보던 중 블랙 룩을 입은 중년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스웨덴에서 활동하고 있는 52세의 스타일리스트 우르술라 봉안데(Ursula Wångande). 스톡홀름 에이전시 니쉬의 캐스팅 디렉터 도라 디아만트는 그녀를 발견하고 바잘리아에게 사진을 보냈고, 그녀는 바로 캐스팅됐다. “쇼에서 내 모습 그대로 순수하게 보이길 원했습니다.” 봉안데의 말을 증명하듯 무대에 오른 그녀의 메이크업은 나이를 감추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물론 발렌시아가엔 이번 시즌에도 변함없이 노년 모델을 비롯해 다양한 체형과 직업군을 가진 인물들이 새 컬렉션을 입고 등장했다. 발렌시아가뿐 아니라 집시 스포츠, 오프닝 세레모니, 돌체 앤 가바나 등 여러 컬렉션에서 트랜스젠더를 비롯해 플러스 사이즈, 다양한 연령층과 인종으로 구성된 모델들이 런웨이를 채웠다.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는 미감에 동의하는 디자이너가 2019 S/S 패션위크에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건 패션 포럼 사이트인 패션스팟이 산출한 수치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4대 패션 도시의 쇼에 선 모델 중 36.1% 가 유색인종이다. 2015 S/S 시즌에 17%였던 점을 감안하면 급증한 수치임을 알 수 있다. 인종을 비롯해 연령대도 다양해졌고, 플러스 사이즈 모델,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여성도 남성도 아닌 사람) 역시 런웨이에서 영역을 꾸준히 확장해가고 있다.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좇는 건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또한 하이엔드 패션이라도 특수 계층만을 위한 결과물을 내놓는다면 이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기 어려울 것이다. 휴대폰만 있으면 누구나 컬렉션을 보고 평가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이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가를 지불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건 물론 디자이너에게만 던져진 숙제가 아니다. 패션을 소비하는 태도에도 분명 책임이 뒤따른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제, 이 긍정적인 변화에 동참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