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EL

샤넬 컬렉션은 늘 쇼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 테마를 감지할 수 있다. 이번 오트 쿠튀르 컬렉션 역시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민 그랑팔레를 보며 그 핵심 요소가 꽃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장미, 아이비, 재스민 넝쿨이 자리 잡은 격자 구조의 나무 터널을 비롯해 쇼장 중앙의 거대한 분수까지 고풍스럽고 호화로운 저택의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비밀스럽게 정원을 산책하는 듯한 즐거운 분위기에서 쇼가 시작되었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꽃으로 장식한 헤어피스와 베일을 쓴 모델들이 클래식한 트위드 수트를 입고 정원을 활보하기 시작한 것. 싱그러운 풀잎의 향이 느껴질 듯한 그린, 어여쁜 꽃이 연상되는 다양한 핑크 컬러 덕분에 트위드 소재에 마치 아주 작은 꽃송이들이 내려앉은 듯했다. 아이코닉한 디자인의 다양한 변주 역시 흥미로웠다. 트라페즈 라인, 라운드 숄더, 기모노 슬리브로 재해석해 여성스러움을 한껏 고조시킨 트위드 수트의 향연이 펼쳐졌다. 쇼가 무르익자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백미인 우아한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레스는 하나같이 플리츠와 튈, 깃털 장식으로 실루엣을 과감하게 강조한 것이 특징. 물론 프랑스 자수의 일종인 플륌티로 구현한 꽃 장식, 둥글게 말린 깃털, 호화로운 주얼 브레이드와 함께 각종 비즈, 실버
실리콘 조각으로 반짝임을 극대화하는 등 샤넬 공방의 장인정신을 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기에 등꽃, 동백꽃, 팬지, 아네모네, 제비꽃, 카네이션 등 다채로운 꽃을 모티프로 활용해 여심을 공략했다. 시대극에 어울릴 법한 고풍스러운 스타일이 대부분이었지만, 플리츠를 활용해 아주 모던하게 디자인한 드레스로 밸런스를 맞추며 쇼를 유연하게 이어갔다.

컬렉션의 완성도를 높인 액세서리도 시선을 끌었다. 모든 룩은 그에 어울리는 소재로 만든 앵클부츠와 헤어피스를 매치해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디자인은 같을지라도 똑같은 슈즈와 헤어피스가 단 하나도 없었으니, 과연 오트 쿠튀르 컬렉션다웠다.

과감한 깃털 장식이 압도적인 화이트 수트를 끝으로 쇼는 막을 내렸다. 칼 라거펠트와 함께 등장해 꽃을 뿌리며 인사를 전한 칼의 대자 허드슨 크로닉을 향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꽃을 보는 샤넬만의 시각과 그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꿈 같은 시간이었다. 컬렉션을 보는 내내 따뜻한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으니 봄을 그대로 옮겨놓은 무대라 할 만하지 않은가.

 

 

DIOR

디올의 이번 컬렉션은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다 간 여성 아티스트, 레오노르 피니(Leonor Fini)에게서 시작됐다. 크리스찬 디올이 디자인한 옷을 즐겨 입으며 그에게 초현실적 아름다움을 명확하게 제시했던 레오노르 피니의 시선이 다양한 요소로 컬렉션에 녹아들어 있었다. 거대한 새장과 사람 신체 모양의 석고상이 공중에 떠있는 예술적인 분위기의 쇼장부터 압도적이었다. 쇼는 깔끔한 실루엣의 페미닌한 드레스와 아주 모던한 디자인의 매니시한 팬츠 수트, 턱시도 코트가 균형을 이루며 펼쳐졌다. 블랙 앤 화이트로 구현한 옵티컬 패턴과 일러스트 패턴, 두껍고 무거운 새틴과 시스루나 깃털처럼 부드러운 소재의 대조로 영민하고 강렬한 컬렉션을 각인시켰다. 무엇보다 ‘미 투 캠페인’이 연상되는 피날레에 등장한 블랙 드레스의 향연에서 페미니즘에 심취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메시지가 뚜렷하게 전해졌다.

 

 

VALENTINO

이번 발렌티노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먼저 컬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분한 베이지와 브라운, 부드러운 베이비 블루와 라일락, 선명한 핫핑크와 머스터드 등 다양한 색을 총망라했는데, 하나의 룩에 여러 색을 적절하게 조합해 디자이너의 감각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디자인 역시 코트와 재킷, 팬츠와 스커트 등 대단히 베이식하고 심플한 것부터 프릴을 풍성하게 장식한 드라마틱한 드레스까지 폭넓게 제안했다. 단정한 룩에는 색색의 리본이나 필립 트레이시가 디자인한 구름 같은 깃털 모자로 포인트를 주고, 드레스는 액세서리를 배제하고 과감한 실루엣과 섬세한 플라워 자수로 승부수를 띄워 밸런스를 맞췄다. 나날이 무르익어가는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가 그리는 세계를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쇼.

 

 

MAISON MARGIELA

“내가 디자이너로 다시 돌아왔을 때, 모든 사람이 휴대폰으로 쇼를 보고 있었어요.” 존 갈리아노는 메종 마르지엘라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적용한 특별한 아이디어의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초대장에 휴대폰의 플래시를 켜고 쇼를 보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 궁금증을 증폭시켰으니! 극도로 해체적인 스포티한 드레스에 플래시 불빛을 비추자 적외선카메라를 켠 듯 프리즘 컬러가 드러났다. 이런 마법 같은 패션 판타지를 구현하기 위해 카메라 플래시에 반응하는 폴리우레탄, 홀로그램 소재와 도트 패턴이 레이어링되었을 때의 착시 효과 등 여러 과학 기술을 동원했다는 후문. 비록 옷은 다소 기괴하고 난해했지만 마치 미래로 초대된 듯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 디자이너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박수를!

 

 

GIVENCHY

달빛이 드리운 밤의 정원이 연상되는 곳에서 클레어 웨이트 켈러의 첫 번째 지방시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 공개됐다. 쇼를 주도한 밤과 달빛이라는 키워드는 초반엔 종교적인 이미지로 룩에 반영됐다. 모델 정소현이 오프닝에 입고 등장한 숄더 라인을 날카롭게 재단한 검은색 수트가 바로 그 증거. 각이 잡힌 매니시 재킷과 코트 그리고 튈과 레이스로 만든 부드러운 실루엣의 스커트와 드레스가 조화를 이룬 룩이 뒤를 이었고, 곧 달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자수와 비즈 장식, 달 그림자가 연상되는 그러데이션 프린트, 달이 지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도트 패턴 등으로 신비로움을 배가시켰다.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건 바로 무지갯빛 피날레 드레스!

 

 

ARMANI PRIVE

노장은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무려 63벌의 룩이 런웨이를 수놓은 아르마니 프리베. 오프닝을 장식한 건 클래식한 실루엣은 비슷했지만 다양한 색과 소재로 변주한,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상징인 팬츠 수트. 리본과 플라워 프린트를 활용한 미니드레스가 뒤를 이었고, 후반부엔 수트를 입은 가드의 호위를 받으며 롱 앤 린 실루엣의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을 장식한 건 마치 꽃송이처럼 풍성하게 주름진 스커트가 돋보이는 드레스. 하지만 쇼를 보는 내내 모던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노장의 전성기가 그리웠다. 마리옹 코티아르와 이자벨 위페르가 프런트 로에서 쇼를 감상했지만, 그녀들이 과연 레드카펫 드레스로 아르마니 프리베를 선택할지는 의문이었다.

 

 

GIAMBATTISTA VALLI

패션계에서 손꼽는 로맨티스트 지암바티스타 발리. 꽃과 드레스를 유독 사랑하는 그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언제나 보는 내내 꿈꾸는 듯 달콤한 기분을 안긴다. 조화, 관능, 낭만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발리는 이번에도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여인들이 푹 빠질 만한 드레스를 만들어냈다. 여러 종류의 작은 꽃 자수와 프린트, 가느다란 주얼 장식 라인, 사랑스러운 리본 등으로 치장한 갖가지 드레스로 컬렉션을 가득 채운 것. 물론 피날레를 장식한 건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전매특허인, 환상적일 정도로 풍성한 튈 드레스! 그가 추구하는 미학은 전형적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