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LCE & GABBANA

1990년대 그룹 아쿠아의 히트곡 ‘바비걸’이 돌체 앤 가바나의 마음을 지배했다. 바비 인형이 자신이 원하는 가상현실을 꿈꾸는 내용의 가사는 지금 젊은 세대의 문화에 완벽하게 들어맞으니 말이다. 디자이너 듀오는 사이버 세상을 거침없이 시각화했다. 쇼가 시작되자 구식 텔레비전의 화면 조정이 떠오르는 무지갯빛을 디지털 패턴으로 재해석한 현란한 룩이 쏟아져 나왔으니! 1990년대 슈퍼모델이 떠오르는 섹슈얼한 블랙 드레스와 보디수트가 그 뒤를 이었고, 블랙 & 화이트 패턴과 네온 컬러로 포인트를 준 룩으로 정신을 쏙 빼놓은 후 블링블링한 메탈릭 컬러 일색의 퓨처리스틱한 스타일로 대미를 장식했다. 이런 극도의 화려함은 1990년대를 풍미한 섹슈얼한 스타일을 탐내는 요즘 세대를 위한 제안이라는 게 디자이너 듀오의 설명이다. 분명한 건 힘을 뺀 룩은 단 하나도 없었고, 최선을 다해 디테일을 추가하고 또 추가했다는 거다. 그래서 모든 룩이 분명히 돌체 앤 가바나다웠고 그들의 마니아를 사로잡았을지는 모르지만,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에서 지금 당장 이 옷을 입고 길거리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는 의문이었다.

DRIES VAN NOTEN

드리스 반 노튼은 옷과 움직임만으로 짙은 여운을 남겼다. 과장된 포즈와 1990년대 벨기에 패션에서 영감 받은 극적인 디자인을 통해 순수와 열정, 남성성과 여성성, 자유분방하면서도 활력 넘치는 몸짓, 성별의 융합과 포용이라는 키워드를 완벽하게 표현한 것. 이를 위해 세계적인 현대무용단 로자스(Rosas)와 울티마 베스(Ultima Vez)를 포함한 47명의 공연단과 모델이 힘을 합쳤고, 패션과 뷰티, 정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덴마크 출신의 사진가 카스페르 세예르센(Casper Sejersen)이 지휘를 맡았다. 가공할 스케일이나 혁신적인 촬영 기법은 없었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공연 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파하고 패션에 절묘하게 녹여낸 이번 쇼는 한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드리스 반 노튼의 부활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EMILIO PUCCI

에밀리오 푸치는 창립자의 위대한 유산이 얼마나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브랜드다. 이국적인 컬러로 채색한 지오메트릭 패턴, 일명 푸‘ 치 패턴’ 으로 불리는 이 아이코닉한 자산은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게다가 지난 몇 시즌 동안 기존 이미지를 탈피하고 젊은 세대에 어필하기 위해 코셰나 토모 코이즈미 같은 게스트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등 꾸준히 기울인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보디수트와 타이츠가 컬렉션의 지분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금세 눈치챌 것이다. 은은한 컬러 일색의 푸치 패턴을 프린트한 보디수트와 타이츠를 입은 채 쿨하고 힙한 감성을 발산하는 셀러브리티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지 않는가? 아니나 다를까 푸치의 빈티지 피스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아이템으로 등극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렇다고 꼭 패턴과 변화에 의존한 행보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길. 스키웨어와 리조트 아이템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브랜드의 아카이브에서도 지금과 흡사한 룩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DIOR

종종 별자리와 신화처럼 신비한 영역에서 영감을 받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새 시즌 <미녀와 야수> <신데렐라> <빨간 두건> <잠자는 숲속의 공주> <분홍신> 등의 동화가 지닌 기묘한 분위기를 컬렉션 영상에 담아냈다. 현대무용가 10명의 기이한 춤으로 시작한 쇼는 곧 베르사유궁 복도를 비췄다. 장소에서 전해지는 웅장하고 화려한 기운이 앞서 나온 장면과 대조를 이루며 마치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영상인 것 같은 착각을 안겼으나, <빨간 두건>을 연상시키는 붉은색 헤드스카프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속 마녀 캐릭터를 떠올리게 하는 플리츠드레스처럼 동화의 주인공들이 21세기에 산다면 입었을 법한 옷들이 등장하며 주제를 성실하게 드러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모델과 역동적인 무용을 교차해 보여주는 영상은 러닝타임 내내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패션과 동떨어진 테마를 고르고, 둘 사이의 접점을 영민하게 찾아내 감각적으로 해석하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능력이 돋보인 쇼였다.

DAVID KOMA

데이비드 코마의 시선은 머나먼 우주로 향했다. 우주여행에 대한 그의 로망과 공상 덕분에 스포티하고 퓨처리스틱한 룩이 지구에 불시착했다. 디자이너가 사랑하는 보디 콘셔스 실루엣, 레트로풍 그래픽 패턴, 번쩍이는 크리스털 장식과 파격적인 네온 컬러가 조화를 이뤘는데, 데이비드 코마가 꿈꾸는 우주여행이 어떤 모습인지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특히 둥근 모양을 비롯해 칼로 베어낸 듯 날렵한 사선 모양 등 날카롭고 예민한 라인을 이루는 커팅을 적절하게 활용해 룩의 완성도를 더한 것은 물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만약 이브닝 웨어 일색이었으면 현실성이 떨어졌을 터. 하지만 우주복 같은 둥근 실루엣의 보머 재킷과 사이클링 쇼츠, 스웨트셔츠 등 실용적이면서 스포티한 아이템을 매치해 데일리 룩과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마치 우주로 떠나온 듯 황홀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컬렉션.

CHANEL

샤넬의 새 시즌 컬렉션은 ‘대조’에서 출발했다. 부피가 크고 도톰한 코트와 대조되는 시어한 스타킹, 관능적인 분위기와 대조되는 편안한 실루엣처럼 형태적이고 관념적인 측면의 대조 말이다. 쇼를 앞두고 버지니 비아르가 남긴 짧은 코멘트는 주제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나는 대조를 좋아한다. 그래서 두껍고 부피가 큰 겨울옷을 선보일 장소로 아주 작은 공간을 원했다.” 그의 말처럼 겨울밤의 스키 캠프를 테마로 한 쇼 베뉴에 줄지어 등장한 컬렉션 룩은 트위드와 스커트 수트, 체크 패턴, 블랙과 화이트 컬러, 레이디라이크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하우스가 오래도록 지켜온 고급스러운 요소를 총망라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과장된 실루엣의 털 부츠, 캐주얼한 퍼퍼 코트와 데님 팬츠, 반항적인 메이크업과 만나 테마를 뒷받침하듯 우아하면서도 쿨한 대비를 이루었다.

CHLOÉ

끌로에는 창립자 가비 아기옹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공표했다. 이는 가브리엘라 허스트를 브랜드의 새로운 수장으로 내세운 전략에서도 확인됐다. 가브리엘라는 영민하게 자신의 브랜드에서도 가장 중요시하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철학을 끌로에에 고스란히 주입했다. 합성섬유와 인조섬유를 제외하고 재활용과 재사용한 유기농 데님과 실크, 캐시미어 등을 주재료로 사용한 것은 물론 부자재도 도금을 최소화했다. 끌로에의 상징인 이‘ 디스’ 백의 새로운 버전 중 50점은 빈티지 이디스 백과 이번 컬렉션을 만들고 남은 소재를 조합해 완성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노숙인에게 최적화된 수트를 무료로 제공하는 비영리단체 셸터수트와 함께 ‘셸터수트 끌로에 백팩’을 제작해 백팩이 하나 팔릴 때마다 셸터수트 두 벌을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사회에도 공헌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가브리엘라 허스트의 다양한 영역에 걸친 고민 끝에 탄생한 첫 끌로에 컬렉션이 심미적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이다. 동시대 여성들의 낮과 밤, 그리고 신념까지 책임질 컬렉션임이 분명하다.

CELINE

패션위크 중 모델들의 OOTD를 본 적 있는가? 오래 입어 자연스레 색이 바랜 데님 팬츠, 크롭트 톱에 디자이너에게 선물 받았을 것 같은 ‘값비싸 보이는’ 재킷, 피곤한 얼굴, 푸석푸석한 머리. 마지막으로 흰 양말에 부츠를 신고 알 수 없는 브랜드의 캡을 눌러쓴 모습.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에디 슬리먼이 유난히 잘하는 것 중 하나도 바로 이것. 꾸미지 않은 듯 꾸민, 흔히 ‘파리지엔 시크’라고 하는 룩을 완성해내는 것이다. 파리 외곽에 자리한 보르비콩트성 정원에서 바람을 헤치며 걷는 모델들은 구성은 다르지만 모두 이 같은 차림이었다. 시퀸을 장식한 톱과 데님 팬츠, 플란넬 셔츠와 배기팬츠, 짧은 사파리 재킷에 왕가 여인들의 전유물이던 크리놀린을 입은 모습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에디 슬리먼은 자신의 추종자들이, 셀린느라는 브랜드에 오래 열광해온 이들이, 아니 지금을 사는 여자들이 갈망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50~60 대 여성부터 Z세대까지 모두 만족시킬 컬렉션이다. 에디 슬리먼의 셀린느에 그리 열광하지 않던 에디터도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 봤다. 한숨을 쉬며.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에디 슬리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CAROLINA HERRERA

캐롤리나 헤레라의 론칭 40주년을 맞아 웨스 고든은 브랜드의 전성기인 20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렸다. 1981년 캐롤리나 헤레라가 메트로폴리탄에서 컬렉션을 발표할 당시 입었던 와이드 칼라로 포인트를 준 체크 블라우스와 팬츠가 웨스 고든의 눈을 사로잡은 것. 그 영향인지 아주 실용적이면서도 러블리한 분위기의 룩이 컬렉션을 주도했다. 먼저 패턴을 적극 활용했다. 하트와 도트, 기린 패턴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룩에 경쾌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는데, 이 중에서도 하트 모티프를 레이저 커팅이나 자수, 버클, 주얼리 등으로 다채롭게 활용해 사랑스러움을 배가했다. 그 결과 발랄한 매력이 돋보이는 마이크로 미니 드레스, 풍성한 실루엣의 블라우스와 와이드 팬츠, 후드로 드라마틱한 느낌을 더한 판초 등 데일리웨어로도 손색없는 아이템이 대거 등장했다. 물론 오프 숄더와 스위트하트 네크라인 드레스처럼 이브닝 웨어를 함께 구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룩이 사교계의 공주뿐 아니라 여왕의 마음까지 사로잡기엔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ALBERTA FERRETTI

“저는 여성을 위해 디자인하는 여성입니다.” 디자이너 알베르타 페레티는 새 컬렉션 공개에 앞서 비장하게 자신의 신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불어 현실적인 옷과 진부한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전하고 싶은 것들은 명확하게 룩으로 완성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일상적이지만 뻔하지 않은 감각적인 스타일이 주를 이뤘는데, 밀리터리 무드로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고 그 위에 페미닌한 요소를 적절하게 가미해 리듬감을 더했다. 또한 각종 그린 톤을 비롯해 캐멀, 머스터드, 블랙, 골드로 채운 컬러 팔레트, 그리고 절도 있는 실루엣의 아우터와 팬츠로 카리스마를 부여했다. 만약 이게 다였다면 밀리터리 스타일을 재현한 컬렉션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네크라인에 러플을 단 블라우스와 플리츠스커트처럼 부드러운 분위기를 은은하게 더할 수 있는 아이템을 매치했고, 후반부에 알베르타 페레티만의 우아한 감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이브닝 웨어를 다양하게 제안했다. 오랜 시간 여성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읽어온 거장의 세계관이 확고하게 전해진 컬렉션.

CECILIE BAHNSEN

파리 패션위크 기간에 영상으로 새 컬렉션을 공개한 세실리에 반센. 온통 회색빛을 띠는 도회적인 공간에서 적막하게 시작한 영상은 바닷가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희망적인 분위기로 막을 내린다. 내내 다정하고 섬세한 옷들이 위로해주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면, 디자이너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은 것이다. 세실리에는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그려냈으며, 모든 룩의 실루엣을 다듬는 작업에 몰두했다고 전했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소재의 특성과 차이를 명확하게 분석하고 재조합해 조화를 이루는 작업이 필수였다. 살갗이 비치는 얇은 니트와 잔잔한 패턴으로 누빈 실크, 패턴처럼 입체적인 자수를 더한 오간자처럼 섬세한 소재로 풍성한 볼륨을 완성하거나 혹은 타이트하게 조여 하나의 룩에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뤄냈다. 룩이 마치 조각품처럼 느껴지는 건 그녀가 즐기는 톤온톤 스타일링 덕분일 것이다. 세실리에 반센이 써나가는 신비로운 동화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BLUMARINE

지난 시즌 블루마린 데뷔 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니콜라 브로그나노는 그 기세를 새 시즌까지 꾸준히 이어갔다. 이번에도 1990년대 팝 스타들의 히트곡이 떠오르는 발칙하고 사랑스러운 스타일이 컬렉션을 주도했다. 골반에 걸친 플레어 팬츠, 레이스와 비즈를 장식한 손바닥만 한 크롭트 톱, 잔망스러워 보이는 비비드 컬러 퍼 장식과 플라워 패턴, 납작한 베레모와 커다란 나비 장식 벨트 등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즐기던 아이템을 2021년 버전으로 오마주한 듯한 룩이 줄지어 등장했다. 그래서 트렌드에 뒤처져 보였느냐고? 돌고 도는 유행 속에 켄달 제너, 지지 하디드, 두아 리파 같은 셀러브리티들이 과거 스타들과 흡사한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 맹물 같은 뉴 노멀 스타일에 질린 이들이라면, 톡 쏘는 짜릿한 칵테일 같은 블루마린의 제안에 분명 매력을 느낄 거다. 니콜라 브로그나노의 노림수는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인다.

BALENCIAGA

발렌시아가는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줄 거라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번에도 역시 발렌시아가였다. 디지털 런웨이도 VR 프레젠테이션도 아닌, 게임이라니! 세기말 분위기로 충만한 2031년을 배경으로 한 게임 <Afterworld: The Age of Tomorrow>를 통해 새 컬렉션을 공개한 것. 한 편의 공상과학영화처럼 스토리가 존재하는 듯 보였고, 여러 섹션으로 나뉜 배경에 따라 룩의 분위기가 반전되는데, 마지막에는 모델 엘리자 더글러스가 아서왕 신화처럼 검을 꺼내들고 평화를 공표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며 끝난다. 즉, 영상의 분위기와 달리 종말이 아닌 희망에 찬 미래를 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 데드 스톡으로 완성한 퍼, 누군가가 평생 입은 듯한 그런지한 데님 팬츠, NASA 로고를 새긴 우주복 스타일의 퍼퍼 재킷, 기사의 갑옷을 닮은 사이하이 부츠까지, 이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자연과 균형을 찾기 위해 벌이는 일종의 전투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컬렉션을 보여주는 방식 그리고 그 내용을 채우는 룩, 이 모든 것은 게임에 열광하는 발렌시아가 주고객들의 마음을 충분히 사로잡고도 남을 듯하다.